정보를 얻는 능력에서, 골라내는 능력으로
인터넷과 SNS, 그리고 AI까지. 이 기술들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새로운 무언가를 알아내는 게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자료를 찾고, 아는 사람에게 묻고, 발품을 팔았겠죠.
그런데 지금은 검색 한 번이면 관련 정보가 홍수처럼 나옵니다. 여기서 문제는 틀린 정보도 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AI를 활용하는 시대에는
단순히 정보를 얻는 능력보다,
올바른 정보를 골라내는 능력이 중요해집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예전에 접했던 개념 하나를 다시 꺼내보게 됐습니다. '절대가치'입니다.
《절대가치》가 10년 전에 말한 것
2014년에 스탠퍼드의 이타마르 시몬슨 교수와 마케팅 전문가 에마누엘 로젠이 쓴 《절대가치(Absolute Value)》라는 책이 있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예전에는 소비자가 물건을 사기 전에 그게 진짜 좋은지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브랜드를 봤습니다. 나이키니까 괜찮겠지. 브랜드는 품질을 대신 추측하게 해주는 대리 지표였던 겁니다.
그런데 후기를 볼 수 있는 리뷰 시스템이 대중적으로 도입되면서, 사람들이 사기 전에 실제 품질을 꽤 짐작할 수 있게 됐습니다. 추측을 도와주던 장치의 힘이 약해진 거죠.
즉 실제 제품이 얼마나 좋은지가 더 중요해지기 때문에, 인지된 가치(Perceived Value)에서 경험된 가치(Experienced Value)로 무게 중심이 이동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 변화로 소비자들이 더 합리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봤습니다. 이 논리로 '브랜드의 힘이 약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 이 예측은 어느 정도 사실이 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영역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는 무명 브랜드가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소비자가 믿어주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새롭게 탄생한 브랜드가 시장을 혁신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AI는 정보 해석 비용까지 낮춥니다
이 책의 내용은 2026년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당시 저자들이 이야기한 것은 주로 리뷰, 검색, 가격 비교, 소셜미디어, 전문가 평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기에 AI가 추가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소비자가 절대가치를 판단하기 위해 정보를 직접 찾아야 했습니다. 이제는 AI에게 이렇게 요청할 수 있습니다.
"이 세 제품 리뷰 2,000개를 종합해서
광고성 후기 제외하고 장단점 비교해줘."
그러니까 책의 논리를 연장하면, 인터넷이 정보 접근 비용을 낮췄다면 AI는 정보 해석 비용까지 낮추고 있는 셈입니다.
최근 맥킨지가 유럽 5개국 소비자를 조사한 결과를 봤습니다. 2026년 1분기 기준으로 쇼핑에 AI를 쓴다는 응답이 나라별로 59%에서 74%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결제나 재구매처럼 실제 거래에 AI를 쓴다는 응답은 25%가 안 됐다는 점입니다. 대신 절반 가까이가 제품이나 브랜드를 알아보는 데 썼고, 40% 정도가 여러 선택지를 비교하는 데 썼습니다.
이 흐름을 보면 현재까지는 AI가 소비자를 대신해서 구매하는 단계보다, 소비자가 더 잘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부터 빠르게 커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변화가 기업에게 꽤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잘 포장하는 것보다, 실제로 좋은 것이 중요해집니다
AI가 정보를 더 쉽게 찾고, 수많은 후기와 비교 자료를 대신 읽어주고, 장단점까지 정리해주는 시대가 되면, 기업이 만들어낸 메시지만으로 소비자의 판단을 통제하기는 점점 어려워집니다.
물론 브랜딩도 중요하고, 광고도 중요하고, 마케팅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좋은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실제로 좋은 것은
브랜딩, 광고, 마케팅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낮춥니다.
AI는 그것을 더 빨리 발견하고 설명해주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앞으로 더 신경 써야 할 것은 '어떻게 더 좋아 보일까?'가 아니라 '어떻게 실제로 더 좋아질까?'에 가까워질 겁니다.
그렇다면 본질을 어떻게 강화할 수 있을까요.
- 제품을 파는 회사라면 — 제품 자체의 경쟁력을 높이고
- 서비스 회사라면 — 고객이 실제로 경험하는 결과를 개선하고
-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 콘텐츠 자체의 가치를 높여야 합니다
결국 자신의 사업 영역에서 고객이 실제로 경험하는 절대가치를 계속 높여야 하는 거죠.
개인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저는 이 변화가 기업뿐 아니라 일하는 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AI가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실행 업무를 점점 더 많이 대신해준다면, 사람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그 위 단계로 이동합니다.
예전에는 자료를 빠르게 조사하는 능력, 디자인을 직접 만드는 능력, 데이터를 정리하는 능력 자체가 경쟁력이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작업 중 상당 부분을 AI가 해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남는 중요한 역할은 무엇일까요.
저는 결국 무엇을 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능력,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디렉팅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 AI에게 어떤 지시를 해야 하는지
- 나온 답 중 무엇이 맞고 틀린지
- 어떤 방향이 우리 사업에 맞는지
- 무엇을 버리고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 결과물을 어디까지 수정해야 하는지
이런 판단은 결국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이해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조금 역설적이지만, AI를 잘 쓰기 위해서는 오히려 자신의 분야를 더 깊게 알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마케팅을 모르는 사람이 AI에게 마케팅을 맡긴다고 해서 갑자기 뛰어난 마케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디자인의 기준이 없는 사람이 AI에게 디자인을 맡기면 결과물이 그럴듯한지 아닌지는 구분할 수 있어도, 왜 좋은지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사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AI가 수십 가지 전략을 제안해도 무엇을 선택하고 다듬을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실행이 쉬워질수록 판단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AI가 실행의 격차는 줄여줄 수 있지만, 판단의 격차까지 자동으로 줄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실행이 쉬워질수록 판단의 차이는 오히려 더 크게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AI 시대를 준비한다는 말을 단순히 새로운 AI 도구를 많이 써보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도구를 익히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건 기본이 될 겁니다. 이 기본 위에서 우리의 경쟁력을 판가름하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의 본질을 더 깊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내 사업에서 고객이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 우리가 제공해야 하는 핵심 가치는 무엇인지
- 경쟁사보다 실제로 더 잘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명확할수록 AI에게도 더 좋은 지시를 할 수 있고,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더 잘 판단하고, 더 잘 디렉팅하는 게 중요해지는 거죠.
앞으로 AI의 성능은 계속 좋아질 것 같습니다. 정보를 찾는 비용도, 분석하는 비용도, 무언가를 만드는 비용도 계속 낮아질 것 같고요. 그럴수록 역설적으로 더 귀해지는 것은 무엇이 더 올바르고, 더 중요한지 아는 사람일 겁니다.
저는 이 기준에 맞춰 AI 시대를 준비해 보려 합니다.
참고한 자료
- Itamar Simonson · Emanuel Rosen, 《Absolute Value: What Really Influences Customers in the Age of (Nearly) Perfect Information》, HarperBusiness, 2014
- McKinsey & Company, An update on EU consumer sentiment: The uptake of AI shopping tools — 2026년 1분기, 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페인·영국 소비자 조사